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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에세이 ‘그리운 시절’ 연재, ‘나의 외가’ (5)(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나의 외가]
초등학교 시절, 큰 제사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외할아버지를 따라 그분의 본가를 방문한 일이 있다. 사방으로 문이 난 커다란 기와집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집안의 법도도 정갈해 외할아버지에게는 동생이 되시고 나에게는 작은 외할아버지 되시는 어른은 창열사(彰烈祠)라는 사당에서 큰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맡고 계셨다. 진주성 안에 위치해 있던 창열사는 돌아가신 장군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 해마다 그 분들의 넋을 기리는 제사가 있었다.
김해 김씨, 외할아버지의 본가는 대대로 양반의 가문이었다. 그러한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신 외할아버지는 젊었을 적 풍류를 즐기는 한량이셨다. 지금도 진주는 멋과 맛과 풍류의 도시거니와 당시에는 경상남·북도를 통틀어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였다. 조선시대 경상관찰사가 상주하던 곳 또한 진주였다. 본래 산세와 수세가 수려한데다 한양에서 내려온 높으신 양반들이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풍류의 흥이 솟아나고 인물 좋고 예악에 능한 기생들이 많기로 이름 높았던 것이다.
유복한 집안의 둘째 도련님으로 태어난 나의 할아버지 역시 한동안 풍류를 아는 한량의 삶을 즐기셨다. 그러나 좋은 것도 지나치면 흠이 되고 마는 것이 이치이니 장가를 드시고도 계속된 한량의 삶은 집안을 기울게 하고 말았다. 왜정이 시작되며 몰락하기는 했으나 역시 양반의 가문에서 시집오신 외할머니의 고생이 어렴풋이 짐작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평생 그런 원망을 입에 올리신 적이 없다. 흥함과 쇠락을 반복하던 집안을 이끌며 모진 일도 많이 겪으셨으나 외할머니는 인내심 강하고 가족을 사랑하던 그 본바탕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본래 진주에 터를 잡고 살아가시던 외가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도 바로 젊은 시절 풍류를 좋아하셨던 외할아버지의 기질에 영향 받은 바 크다. 잦은 기방 출입으로 외할아버지는 결국 가산을 탕진하셨고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일본행을 택하셨던 것이다. 당시는 왜정 때였고 할아버지는 좀 더 넓은 곳으로 가 집안을 일으킬 기회를 보고자 하셨음이리라.
굳은 결심과 함께 배에 오르신 외할아버지의 손에는 당시 다섯 살이었던 어머니의 작은 손이 꼭 쥐어져 있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진주에 남겨 둔 채로 외할아버지는 맏딸인 어머니만을 먼저 데리고 가셨던 것이다.
일본에 터를 잡으신 외할아버지는 처음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으로 일을 시작하셨다. 기생의 섬섬옥수를 쓰다듬던 손에 물집과 굳은살이 박히는 힘겨운 나날이었으리라. 그러나 지난 삶을 버리고 믿음직한 가장이 되기로 결심하신 외할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셨고 곧 공사장의 감독이 돼 기반을 잡기 시작하셨다. 공사장에서 잔뼈가 굵어진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셨고 곧 여러 곳에서 토목공사를 맡아 많은 돈을 모으게 됐다. 가족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집도 마련하셨다.
내가 제대를 하고 부모님을 뵈러 일본에 갔을 때 예전 외가 식구들이 살던 집을 방문한 일이 있다. 산 밑에 자리한 집은 모든 식구들이 지내기에 부족함 없이 컸고 맑은 물도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방탕했던 과거를 털어버리고 식구들 앞에 자랑스러운 가장이 되기 위해 외할아버지가 얼마나 노력하셨는지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좋은 집을 마련한 외할아버지는 진주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기 시작하셨다.
당시 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던 아버지 또한 그 집에서 함께 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선 당신이 감독하시던 토목공사에서 인부로 일하던 아버지를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건너온 데다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눈여겨보던 차에 마침 혼기가 찬 딸까지 있으니 서로 짝을 지어 주셨다.
그렇게 연이 닿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식으로 사모관대에 활옷과 족두리를 차려입고 결혼식을 올리셨다. 나는 두 분이 결혼식 날 찍은 흑백사진을 앨범 가장 앞쪽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쑥스러운 듯 표정을 감추고 앞을 바라보는 그 젊고 말간 얼굴의 부모님을 뵙고 있노라면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때 그 시절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천지에 이토록 늠름한 신랑과 고운 신부가 다시 있으랴.
돌이켜 봐도 그 시절은 우리 가족들의 삶에서 참으로 짧은 행복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 네 분 외삼촌과 이모가 다 함께 지내던 그 단란한 삶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계속된 불행의 시작은 전쟁이 터지고 어머니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었던 기요시(淸) 외삼촌이 일본에서 군수공장에 징집돼 가면서 시작됐다. 많은 이들이 그랬듯 징용으로 끌려간 첫째 외삼촌은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가슴에 아물지 않은 상처를 남긴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길고도 힘겨웠던 전쟁이 끝나고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자 부모님과 어려서 죽은 내 누님, 외가 식구들은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올랐다. 돌아온 외가 식구들은 진주에 정착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왕고모님이 사시던 사천(泗川) 덕곡(德谷)에 터를 잡고 작은 가게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고국의 품에 안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후 평탄한 삶을 꿈꾸셨을 것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긴 했으나 나라는 감격스런 독립을 맞았고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아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난 6·25전쟁은 나의 아버지에게 그러했듯 외가 식구들의 삶도 크게 바꿔 놓고 말았다.
첫째 외삼촌이 2차 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둘째와 셋째 외삼촌마저 차례로 인민군에게 끌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말이 의용군이었지 젊은이들을 끌고 가 총알받이로 이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가족들을 뒤로 하고 전장으로 나간 두 분 외삼촌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셨고 그 일은 두 분의 상처 난 가슴을 할퀴어 더께 내린 딱지를 뜯어내고 또다시 피눈물을 흐르게 했다.
일본과 한국, 두 땅에서 차례로 일어난 전쟁에서 모두 세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평생을 두고 밀려오는 회한에 가슴을 치셨으리라. 다른 일에는 일절 원망의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던 외할머니도, 이때의 일은 두고두고 꺼내어 반추하시며 슬퍼하셨다. 만일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두 아들만은 잃지 않았을 것을. 어렵게 모은 재산을 그리 허망하게 날리지는 않았을 것을. 맏딸과 사위와도 헤어지지 않고, 그 좋은 얼굴 매일 보며 오순도순 살 수도 있었을 것을....이후 삼천포에서 사들인 수산물을 윗녘 마을의 농산물로 바꾸기 위해 트럭을 타고 수백 수천 번 오갔던 길 위에서, 외할머니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곱씹고 또 곱씹으셨으리라.
해방을 맞아 막 진주로 돌아왔을 때 외가의 형편은 그리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 나 할 것 없이 사정이 어려운 친척들을 돌보는 등 모아둔 재산은 바닥이 나고 두 아들마저 끌려가고 나자 외가는 급격하게 기울고 말았다. 이때 사위였던 나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막내외삼촌과 이모를 위해 사천에 집을 마련해 그 분들을 불러 내리셨던 것이다.
이후 목숨에 위협을 느낀 사위가 일본으로 밀항하고 맏딸마저 어린 손주를 남겨 둔 채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고 말았으니 그때에 이르러 외가는 거의 풍비박산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집과 전답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힘을 내셨다. 곁에는 아직 시집 장가들지 않은 딸과 아들이 있었고 맏딸이 두고 간 어린 손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기엔 두 분은 강인한 분들이셨다.
그렇게 외가 식구들은 나를 한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그 분들을 말하지 않고는 내 어린 시절을 얘기할 수 없게 됐던 것이다.
다음편에서 계속...
annje37@nspna.com, 안정은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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