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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그리운 시절

여우이야기 (1)

NSP통신, 안정은 기자, 2013-11-21 17:10 KR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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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P통신-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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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이야기 (1)]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작은 지게를 하나 만들어 주셨다. 나뭇가지와 짚을 엮어 만든 지게는 내 몸에 잘 맞았고 그것을 멘 나는 칼 찬 장수마냥 어깨를 쫙 펴고 뒷산에 올랐다.

내가 정말 장군이고 뒷산에 우글거리는 것이 적군이라도 된다면야 기꺼이 칼을 휘두르며 싸웠을 테지만 나는 어린 나무꾼이요, 무찔러야 할 것은 송충이 등쌀에 말라 죽은 어린 소나무였다.

변변한 방충제도 없던 시절이라 한 번 송충이가 꼬이기 시작한 어린 소나무는 여지없이 누렇게 말라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 죽은 소나무는 좋은 땔감이 돼 줬다. 나와 외할아버지는 함께 산에 올라 죽은 나무를 뿌리 채 뽑아 한 짐씩 져 내려오곤 했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몹시 귀애하셨고 나 역시 그 분을 잘 따랐다. 함께 산에 오를 때면 우리는 손발이 척척 맞는 솜씨 좋은 나무꾼 조손(祖孫)이 됐다.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농사일로 바쁘신 외할아버지 대신 친구들을 모아 함께 큰 골 작은 골에 올랐다. 큰 골에는 키만 비쩍 큰 억새풀이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면 억새풀은 가느다란 허리를 누이며 이리 휘청대고 저러 휘청댔고 그 잎은 산신령님의 길게 늘어진 휜 수염마냥 하늘거리며 나부꼈다.

다시 떠올려 보아도 몹시 운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사내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에게 억새풀 군락의 장관이야 소귀에 경 읽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들고 온 낫을 바로 쥐고 군락의 가장자리부터 차례차례 베 나갔다.

옆 친구는 얼마나 벴나 곁눈질 하랴, 날카로운 날 끝에 손 베지 않으려 신경 쓰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억새를 베다 보면 이마와 등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려 무명옷을 적셨다.

가끔씩 땀을 제 때 닦지 못하면 짜디짠 땀방울은 눈썹을 지나 눈 속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 따끔한 맛에 한 쪽 눈을 질끈 감고 벌떡 일어나면 키 큰 억새 군락 밖으로 고개만 삐쭉이 내민 꼴이 됐다. 그 채로 우리는 산꼭대기를 맴돌던 바람이 까까머리 위를 간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잠시 땀을 식혔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정도로 억새풀을 베고 나면 나와 친구 녀석들은 올라왔을 때처럼 우르르 떼를 지어 산을 내려갔다. 사나흘이 지나 가 보면 베 놓았던 억새는 버석하니 말라 땔감으로 쓰기에 알맞은 정도가 됐다.

우리는 힘자랑이라도 하듯 지게 가득 말린 억새를 지고 내려와 각자 집 뒷마당에 쌓았다. 한 번에 다 가져올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힘들었지만 내색 않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억새풀 더미는 어느 새 키를 훌쩍 넘겨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몹시 대견해하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으쓱하니 기분이 좋아진 나는 힘든 것도 잊고 다시 돌격하는 장수마냥 산으로 올랐다. 이대로라면 밤이 새도록 산을 오르내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우쭐한 기분이 화근이 되고 말 줄이야.

해가 슬며시 넘어가려 하자, 친구 녀석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 한 번만 더 하는 마음으로 홀로 산으로 향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 지를 미리 알았더라면 친구들과 함께 얼른 집으로 향했을 테지만 물론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친구들보다 무언가를 더 해 낸다는 우쭐한 마음 뿐이었다.

어쩌면 녀석은 그런 내 마음을 다 알고 뒤를 따라온 것인지도 모른다. 해질 무렵의 뒷산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도 모르고 으쓱거리며 홀로 산으로 들어온 조그만 사내아이를 혼내주기 위해서 말이다.

옛날이야기 속에서도 그 놈은 꾀바르고 영리한 짐승으로 나오지 않던가. 게다가 나를 단단히 놀래 주기로 작심이라도 했는지 녀석은 발자국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다가왔다. 때문에 겨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어찌나 가까운 곳까지 와 있던지 고르릉거리는 숨소리마저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여우 이야기 (2)에서 계속...

안정은 NSP통신 기자, annje37@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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