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면희 정치칼럼
AI민주화와 정치(서울=NSP통신) 지난 3월에 열린 세기의 바둑대결서 구글의 알파고가 최 고수인 이세돌을 꺾은 이후 AI(즉, 인공지능)에 대한 세계사적 관심이 끊이질 않고 있다.
바둑으로 특화된 알파고의 위력이 AI의 전 분야로 확산돼 응용될 경우, 사회 각 분야에 미칠 그 영향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AI는 강한 것(strong)과 약한 것(weak)의 둘로 대별할 수 있다.
강 AI는 기계에 인간의 지능은 물론 감성까지 실현하는 프로그램 장착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학계가 장차 인조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나타낸다.
이에 반해 약 AI는 인간의 지능과 감성을 빼어나거나 더욱 뛰어나게 흉내(simulation) 내는 프로그램 장착의 인공기계를 도구로써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견해다.
필자는 과학계 인사들 다수가 강 AI와 약 AI를 분별하지 못하는 혼동 속에 놓여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철학 계 일각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 관찰 가능한 경험에 의해 객관적으로 확보된 것만을 지식으로 간주한다는 과학의 대전제를 수용해 인간의 정신적 사유마저 이 범주 안에서 해결코자 시도했는데, 두 가지 단계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귀결된 과정을 과학계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에 대한 과학적 해결이 실패한 이유를 매우 간략히 거론할 수는 있다.
하나는 정신이 두뇌라는 물질상태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에 따른 기능적 정보처리가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신의 흉내일 뿐이지 실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알파고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강 AI가 실현 불가능의 공상이지만, 약 AI가 매우 위력적으로 사회 전반에 파급될 수 있다는 데는 전적으로 공감하게 됐다.
이번 알파고는 16만 건에 해당하는 기존의 바둑 기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광범위하게 구축했고, 입력(input)에 해당하는 이세돌의 착 점에 대응하여 출력(output)에 해당하는 응수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수읽기를 해내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알파고가 신경망 정보처리를 통한 강화 학습에 따라 이기는 수를 스스로 찾아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식을 얻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 즉 시행착오 오류제거 법을 프로그램으로 장착했다는 데 있다.
즉, 이기고 지는 확률적 착 점에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가중치를 주어서 플러스 행보를 스스로 찾아가도록 설계된 것인데 놀랍게도 알파고가 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해낸 것이다.
알파고의 성취는 AI 확산의 전주곡이다. 이미 일정을 짜는 비서의 역할에서 증권가 금융 분석까지 척척 해내고 있다. 그동안 서양이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을 통해 만들어낸 거의 모든 일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CT와 MRI로 확보된 영상자료를 분석해 병의 진척 정도를 판별하고 이에 따른 치료적 처방을 내리는 의사 대부분의 역할을 AI가 대신할 것이다.
범죄 혐의가 각종 증거에 의해 확보돼 검찰로 송치되었을 때 이를 기소할 지의 여부를 가리거나 또는 재판에 넘겨진 피의자의 판결을 다루는 법조계 판검사의 역할 대부분도 대체할 것이다.
한국 국민 다수가 그토록 자식에게 권유한 최고 직업의 의사와 법조인의 자리마저 AI가 대신하게 된다면, 다른 일자리의 경우는 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일자리 대체가 단번에 시도된다면 다수의 단결된 힘으로 저항과 제압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서서히 단계적으로 침투된다면 다수의 대중이 힘 한번 못 쓴 채 도태되는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듯이 AI에게 전원을 공급하는 두꺼비집을 내리는 것은 마지막에나 취할 조치다. 이것은 자칫 과학기술 일반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최선의 방도는 AI로 인한 혜택은 늘리되, 그것으로 인한 폐해는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제어(social control)를 민주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간명하게 AI민주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AI의 기술과 위력을 거머쥔 거대자본과 국가에 의해 새로운 독재가 횡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 만능주의가 경제적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하지만 사회양극화를 심화시켜서 해악을 심각하게 초래할 경우에는 경제민주화로 제어해야 하듯이 AI의 민주화 역시 요청되는 것이다.
서유럽의 보수정치는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경제적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한다면 돈을 좇는 방향으로 치닫는 과학기술의 진행에 제약을 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보수는 경제민주화에 거부감을 갖듯이 AI민주화에도 소극적일 것이다. 반면 전래의 진보정치는 이데올로기적 평등주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장경제 대신에 계획경제를 추구했듯이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권위주의적 통제를 할 가능성이 높아서 그 자유로운 추구를 질식시킬 소지가 적지 않다고 판단된다.
전통의 보수와 진보정치 모두 AI민주화에 알맞다고 볼 수 없다. 자유주의와 평등주의가 적대적 대립구도 속에 설정돼 있는 한, 그렇다는 말이다.
최적의 해법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을 신공동체주의 정치철학과 그 연계적 자아(inter-relational self)의 상에서 찾고자 한다.
여기는 자유적 자아의 고유성 실현이 연계돼 있는 가족과 이웃, 공동체 구성원을 널리 이롭게 함으로써 공동선(common good)을 도모하는 지평이다.
이 시각에서 경제와 과학기술의 자유로운 활성화가 공동의 선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제도적 뒷받침과 제약을 민주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이런 지평에서 비로소 경제민주화와 더불어 AI민주화도 달성할 수 있다.
AI는 인간의 정신을 빼어 닮거나 기능적으로 뛰어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럴싸하게 흉내를 낼 뿐이다.
인간이 직면하는 온갖 현실적 사태에서 행하는 무수한 관계성을 온전히 반영할 방도는 없다.
예컨대 돌발적 위기 상황 등 종합적 판단이 요구되는 외과수술을 행할 수 없고, 찾아온 환자의 손목을 짚어 진맥하는 한의사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화쟁의 방법을 구사하는 원효대사의 통찰이나 기독교인의 영성적 지평에 이를 수 없다.
물론 AI는 인간의 유익한 도구로서 매우 위력적이고 빼어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의 요구만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방치한다면 그 기술과 힘을 거머쥔 과학기술 파시즘의 세상이 도래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혜택과 부담을 민주적으로 숙고하고 통제하는 AI민주화가 장차 펼쳐져야 하고, 정치는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NSP통신/NSP TV people@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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