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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박정희 에세이 ‘그리운 시절’ 연재, ‘서글픈 초등학교 입학식’ (8)

NSP통신, 안정은 기자, 2014-02-21 19:30 KR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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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는 저자의 허락을 얻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연재합니다.

NSP통신-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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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초등학교 입학식]

부모님과 떨어져 외가 식구들과 생활한지도 2년이 되어갈 무렵,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요즘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면야 좋은 옷을 사 입히고 새 학용품을 가득 채운 멋진 가방을 사 메어 주지만 당시는 집안이 유복하지 않은 이상은 그런 사치를 누리기가 힘들었다. 그저 매일같이 입고 산으로 강으로 뛰어다니느라 여기저기 헤진 옷에 천을 덧대어 깨끗이 빨아 입고는 입학식에 나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네모난 보자기에 책과 공책, 연필을 넣고 차곡차곡 묶어 등에 둘러매면 그게 바로 가방이었다. 어쩌다 흰 고무신이라도 신은 아이를 보면 검정 고무신을 신은 내 발을 내려다보며 부러워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밤잠을 설치며 손에 꼽아 헤아리던 입학식 날이 되자 나는 외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남양초등학교로 향했다. 어린 내 눈에 한 없이 넓어 보이던 운동장에는 부모님과 함께 나온 아이들로 가득했다. 이제 좋은 시절은 다 끝났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참새처럼 재잘거리다가 줄줄 흘러내리는 누런 콧물을 옷소매로 쓰윽 닦고는 꼭 잡은 엄마의 손을 보채듯 흔들어대기도 했다. 그런 친구들 틈에 섞인 나는 참으로 마음이 설렜다.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해 선생님께 글과 숫자를 배우고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뛰놀고 풍금 반주에 맞춰 노래도 부를 생각에 내 마음은 여름날 뭉게구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비록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아빠와 함께 오지는 못했지만 나에게는 누구보다 자애로운 외할머니가 있지 않은가. 나는 외할머니를 올려다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외할머니도 그런 내 마음을 아셨던 것일까. 잡은 내 손을 더욱 꼭 쥐시며 주름진 입가에 인자한 웃음을 지으셨다.

마치 장날처럼 왁자한 가운데 입학식은 시작됐고 일학년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들은 자기 반 아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기 시작하셨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아이들은 꼭 잡았던 부모님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고는 선생님 앞으로 걸어 나가 줄을 섰다. 보란 듯이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움에 몸을 배배 꼬며 엄마 손을 놓지 않으려는 소심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억지로 아이의 손을 떼어 내고는 어서 나가라며 아이의 등을 떠밀어 보냈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엄마가 그곳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줄을 서는가 했더니 결국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우왕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녀석도 여럿이었다. 참으로 다양한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 모여들어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장면을 쏟아내던 것이 바로 그날 입학식의 풍경이었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며 나는 내 이름이 호명되면 그 누구보다 씩씩하게 대답하고 의젓하게 걸어 나가 줄도 똑바로 서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선생님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 이름을 놓치지 않으려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입학생의 이름을 반쯤 불렀을까. 그때까지도 내 이름은 호명되지 않은 채였다. 조금 조바심이 나기도 했지만 주위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호명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곧 이름이 불릴 테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돼.”

할머니의 격려도 조급한 내 마음을 달래 줬다. 나는 다시 침착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일까. 200여 명이나 되는 입학생들의 이름이 모두 불릴 때까지 내 이름만은 끝까지 호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 이름 불리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 앞으로 나가 줄을 섰고 부모님들은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려 우르르 몰려나간 후였다. 사람들로 왁자하던 운동장 한 켠에 남은 이라곤 나와 외할머니뿐이었다. 우리 곁에는 오래된 벚나무가 큼지막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함께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려 주고 있었지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애타는 표정으로 할머니를 올려다봤다. 당황하기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된 일인지를 묻고 싶어도 입학식은 이미 시작된 후였고 선생님은 벌써 한눈을 팔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벚나무 그늘에 가려진 우리의 모습에 관심을 두어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할머니.......”

나는 당장에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 참으며 할머니를 올려다봤다. 할머니는 옷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이 맺힌 입가와 이마를 닦으셨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안심시키듯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이라, 정희야. 아무래도 선생님이 너무 바빠 네 이름을 깜박 잊고 부르지 못한 모양이구나. 안 됐지만 입학식 끝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렸다가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보자꾸나. 그러면 될 게야.”

할머니는 내 등을 쓸어 주시며 조곤조곤 설명하셨다. 내 작은 가슴은 걱정과 실망으로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씩씩하고 의젓하게 행동하리라 이미 마음먹지 않았던가. 나는 두 눈에 힘을 주며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을 꾹 참았다.

도대체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의 당부와 훈화의 말씀은 언제쯤에나 끝나는 것일까. 이대로 아이들이 졸업생이 될 때까지 계속되는 게 아닐까. 보란 듯이 입학식에 참석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만 봐야 하는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먹먹하고 서글펐다. 혹시, 혹시 내가 엄마 아빠와 함께 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엄마 아빠가 일본에 계신 나는 이곳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퍼뜩 떠오른 생각은 가뜩이나 처연하던 내 마음을 더욱 애달프게 했다. 인민군이 물러간 뒤, 엄마가 떠나간 바닷가에 나가 홀로 눈물을 훔치며 견딘 시간이 벌써 2년이었다. 오늘만은 그런 서글픔을 잠시 잊고 드디어 초등학생이 된다는 기쁨과 설렘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좋아하였건만......불현듯 떠오른 엄마와 아빠에 대한 생각은 이름 불리지 못한 서러움에 더해져 어린 나의 마음을 마구 헤집었다.

엄마 아빠만 내 곁에 있었더라도. 그랬다면 선생님들도 내 이름을 잊지 않고 제일 먼저 불러 주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도 그런 내 속을 알면 외할머니가 섭섭해 하실까 싶어, 나는 소리 내지 않고 다만 어깨를 들썩이며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울지 말어라, 정희야. 울면 못쓴다. 선생님이 보고 흉보실라. 온 동네에 울보로 소문 날라.”

할머니는 눈물과 콧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시며 나를 달래려 애 쓰셨다. 나는 할머니께 미안한 마음에라도 울음을 그쳐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단지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아 섭섭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온 또래 아이들을 보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호명되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고 다만 이름이 불리지 못한 것 때문에 울음을 터트린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할머니의 마음마저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장난기 많기로는 여느 사내아이 못지않았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온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은 나에게 또래보다 속 깊은 구석을 남겨 놨던 것이다.

차라리 아이처럼 떼를 쓰며 큰 소리로 울면 걱정이라도 덜 될 것을,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삼키는 내가 안쓰러운 할머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셨다. 당장에라도 선생님들 앞으로 나가 왜 내 귀한 손자의 이름은 부르지 않았는지를 물어야 하는지 고민하셨으리라. 그렇게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시던 할머니는 마침 눈이 번쩍 뜨이는 분을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한 분이 학교 담장을 따라 걸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단박에 그분의 얼굴을 알아보신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눈물로 흐려진 눈동자에 내게도 낯이 익은 아저씨를 향해 뭔가를 열심히 호소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아저씨도 할머니의 말씀을 귀 기울여 유심히 듣는 눈치였다. 딱한 사정을 들으신 그 분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나서 주셨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나는 그날 비록 입학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푹신한 소파가 있는 교장실에 들어가는 호사를 누렸다. 할머니가 지초지종을 설명하셨던 아버지의 친구분은 동네 유지였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나는 혹여 운 티가 날까 싶어 몇 번이나 얼굴을 훔치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저 손자의 이름이 불리기를 바라셨을 뿐, 교장실까지 들어오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할머니도 긴장하시긴 마찬가지였다. 지금에야 교장실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지만 그때는 시골 작은 학교라도 교장선생님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할 큰 선생님이셨던 것이다.

“그래, 네 이름이 정희라고?”

교장 선생님이 내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물으시자 나는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말았다. 담임선생님보다도 교장 선생님이 먼저 내 이름을 부르실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최대한 또박또박 내 이름을 말하려 애썼다.

“네. 제 이름은 박정희입니다.”

한 번 이름을 말하고 나자 호명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확 가시는 것 같았다. 어떠냐, 너희들은 담임선생님이 불러준 이름을 나는 교장 선생님 앞에서 여보란 듯이 읊지 않았냔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사소한 일이었지만 괜히 자랑스러워진 나는 움츠렸던 어깨를 쫙 폈다.

“네 사정은 전해 들었다. 아무래도 네가 지내는 외가 기록이 남양면 사무소에 누락된 것 같구나. 전쟁통에 급히 내려왔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비록 오늘 입학식에는 참석 못했다만 네가 보결생으로 우리 학교에 들어올 수 있게 손을 써 놓으마. 어떠냐,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할 수 있지? 친구들이랑도 사이좋게 지내고?”

교장 선생님은 입학생들을 모아놓고 하셨던 훈화말씀을 나에게 다시 한 번 하셨다. 훈화말씀을 여러 번 할 수 있어 교장선생님도 은근히 기쁘셨는지 모른다. 월요일 아침조회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다음 번 아침조회 훈화말씀을 생각해 두시는 게 교장선생님 아니던가.

그렇게 해서 나는 비록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발 늦기는 했으나 결국 남양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학한 순서와 공부 잘 하는 순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어서 나는 초등학교 6년 내리 전교 일등 자리를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 됐다. 선생님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의젓한 나를 몹시 아껴 주셨다. 비록 부모님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는 여러 선생님들의 관심 속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떠올리노라면 지금도 벚나무 아래 서서 내 이름이 불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때의 먹먹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울음을 삼키며 발을 동동 구르던 그 작던 내 모습은 초등학교 생활을 막 시작하던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 나를 온 마음으로 달래주고 보듬어 주시던 외할머님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annje37@nspna.com, 안정은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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