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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박정희 에세이 ‘그리운 시절’ 연재, ‘야이또의 추억’ (3)

NSP통신, 안정은 기자, 2013-12-20 15:20 KRD7
#박정희 #그리운시절 #월간문학 #신간 #야이또의추억

당사는 저자의 허락을 얻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연재합니다.

NSP통신-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최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발간한 박정희 선생의 수필집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 (월간문학출판부 제공)

(서울=NSP통신 안정은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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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또의 추억 (전편)]

나는 6·25전쟁이 나기 2년 전인 1948년, 음력으로 정월 스무 날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덕곡(德谷)이라는 마을로 당시 진주에 사시던 외가에서 십오리 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 마을 신작로 옆집에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남으로 첫 울음을 터뜨렸다.

부모님과 외가 식구들은 해방 후 일본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동포였다. 갓 독립한 고국은 여러 모로 기틀이 잡히지 않아 어지러웠고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엄혹한 시절, 책임감 강한 한국의 가장이 그러하듯 아버지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하셨다.

내가 태어난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왕고모님이 살고 계셨다. 아버지는 오리 쯤 떨어진 왕고모님 댁 근처 길가에 작은 가게를 내고, 무명천을 염색하고 학생들의 교복 짓는 일을 시작하셨다. 차 수리도 도맡아 하셨다. 모두가 일본에서 지낼 때 힘들게 배운 기술들이었고 근방에는 아버지만한 손재주를 가진 이가 없었다. 가게는 번창해 나갔다. 어머니도 직접 만드신 찐빵을 팔아 살림에 보태셨다.

찐빵이라고 하니 지금까지 내 등에 찐빵 모양으로 남은 조그만 흉터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바로 ‘야이또’ 말이다.

세 살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부엌의 무쇠 솥 안에서는 내다 팔 찐빵이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익어가고 있었다. 솥은 내가 들어가 앉아도 될 만큼 컸다. 어머니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비지땀을 흘리시며 부지런히 불 조절을 하셨다. 작은 나뭇가지를 쉼 없이 부러뜨려 불 속에 밀어 넣고 불쏘시개로 쑤셔 불이 잘 일도록 하셨다. 나는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찐빵이 익어가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찐빵이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내다 팔아 살림에 보탤 것이었지 내 목구멍으로 들어갈 것은 아니었다.

나는 찐빵을 하나만 먹어도 될지를 물어볼 기회를 노리며 어머니의 눈치를 흘끔흘끔 살폈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하나쯤 주실 것도 같았지만 철없이 군다고 혼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아버지가 어머니를 부르셨다. 뭔가 급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부엌 밖으로 나가셨다. 내 눈이 반짝 빛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고민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으면 될 것을. 나는 행주로 무쇠 솥 뚜껑을 잘 말아 옆으로 밀었다. 어머니 하시던 것을 늘 보아왔던 터라 맨손으로 뚜껑을 잡으면 손이 델 수도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무쇠 솥 뚜껑은 무거웠지만 결국 스르르 밀리며 뽀얀 찐빵이 드러났다. 그렇게 먹음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손이 저절로 나가 찐빵을 집었다. 혀로 입술을 한 번 핥고 그 따끈따끈한 찐빵을 군침이 고인 입으로 가져갔다. 드디어 이 달콤한 찐빵을 한 입......

그러나 웬걸, 갑자기 나를 뒤덮는 그림자에 놀라 돌아보니 부엌 문간에 어느 새 돌아오신 어머니가 서 계셨다. 찐빵을 채 한 입 베 물기도 전에 보기 좋게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차라리 몇 입 먹기나 하고 들켰으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을.

찐빵을 훔쳐 먹은 경험이 많다면 생선을 입에 물고 달아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얼른 도망부터 쳤겠지만 나는 어리숙한 초범이었다. 나는 찐빵을 손에 든 채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머니를 바라봤다. 엄한 어머니의 표정을 보자 가슴이 졸아들었다. 나는 들었던 찐빵을 제자리에 슬그머니 놓았지만 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셨다. 누가 뭐래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었다. 두 분은 내 성격이 거칠고 기운이 넘쳐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라 생각하셨다. 처음에 잘 다잡아 놓지 않으면 다음에 또 그런 짓을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말 안 듣는 아이를 온순하고 너그럽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야이또’였다. 아이의 몸에 뜨거운 쑥찜을 놓는 것이었다. 겁에 질린 나는 몸부림쳤지만 어머니는 내가 빠져 나갈 수 없도록 팔을 단단히 붙드셨다. 아버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뜨거운 쑥찜을 내 등에 갖다 대셨다. 비명이 절로 나오고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찐빵 하나 몰래 먹으려다 내 등에는 평생 타 버린 찐빵 같은 둥그런 자국이 남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쑥찜 한 번 한다고 아이의 성격이 단번에 고쳐질 수 있겠는가. 그저 아이가 그 뜨거운 맛을 기억하고 앞으로 행동을 조심하느냐, 그깟 쑥찜 한 번에 내가 질까보냐고 하던 대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일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찐빵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 그 방법이 나에게는 통했던 셈이다. 이것이 바로 찐빵에 얽힌 야이또의 추억이다.


야이또의 추억 (후편)에서 계속...

annje37@nspna.com, 안정은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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