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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화교...잿빛 앨범으로 남은 ‘100년 자취’

NSP통신, 김광석 기자, 2016-07-05 10:08 KRD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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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꽌시’의 새지평 열 서해안시대의 소중한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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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NSP통신) 김광석 기자 = 중국 스스로 높여 부르는 중화의 ‘화’와 남의 집이나 타향에 임시로 머물러 사는 교우(僑寓)의 ‘교’를 조합한 합성어 ‘화교(華僑)’는 어의적으로 어색한 불협화음을 이룬다.

특히 한국의 화교는 ‘제후국’ 쯤으로 여기던 타국에서의 곁살이였으니 고단했을 삶을 더 이상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화교를 ‘왕서방’, 짱꼴라‘ 등 온갖 비속어로 조롱하고 정부 또한 차별정책으로 박해를 가했으니 상처받았을 그들의 자존심을 계량할 수 있다. 차별의 무게에 정비례 해 한국의 화교들은 떠났고 이제 그 규모는 의미를 잃을 만큼 미미한 존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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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이 자취를 감추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돼 세계경제의 거인으로 부상한 중국의 시장과 자본, 관광객을 향하는 열망은 가히 ‘열풍’이라고 일컬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전북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화교의 거주지였다. 특히 군산시는 인천 등과 더불어 화교의 생활 및 경제활동의 거점을 이뤘다. 1899년 개항 전후로 둥지를 틀기 시작한 군산화교는 한 때 1600여 명에 이르러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집단거주지를 형성했다.

하지만 한-중 국교 수교가 이뤄지고 서해안시대가 열려 중국이 전북의 가장 큰 교역상대로 부상한 지금 대 중국의 관문인 군산에서 화교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군산의 화교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그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백년 역사의 군산화교

군산 내항과 인접한 장미동의 ‘빈해원(濱海園)’. 화교 2세 소란정(蘇蘭庭) 씨가 산동성 영성시 출신인 선친과 고모부의 가업을 물려받아 7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군산의 대표적인 화교 중국음식점이다. 세월의 풍파를 반영하듯 건물은 낡고 오래됐지만 군산지역 중국음식점의 대명사다.

지난 세월의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지긋한 연배의 시민들에게 군산의 대표적인 중국음식점을 물으면 지금도 어김없이 빈해원을 입에 올린다. 흐릿해진 군산화교의 흔적을 아직까지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자 훈을 그대로 풀면 ‘바다 가까운 음식점’이라는 뜻이니 서해 바다 넘어 고향을 그리는 아련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소 씨 집안이 군산에 정착한 것은 우연이었다. 인천에 자리 잡고 음식점을 운영하던 선친이 한국전쟁 때 제주도로 피난을 가던 중 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중간지대인 군산에 머무르다 인천의 이름난 조리사들을 모두 데려와 지금의 음식점을 차렸다.

NSP통신-빈해원.
빈해원.

빈해원의 외양은 세월에 퇴색됐지만 구조만큼은 옛 영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층 건물에 방만 수십 개. 암울했던 한국전쟁 중에 정착했음에도 당시 군산화교들이 누렸던 경제력의 일단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군산화교들은 음식점으로 경제적 기반을 크게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빈해원의 성공을 목격한 화교들이 군산지역 이곳저곳에 속속 중국음식점을 차리고 성업에 들어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빈해원 바로 옆에는 중국음식을 주 메뉴로 하면서 한식과 양식을 망라한 ‘만춘향’이 자리 잡기도 했다. 당시 서울에서도 보기 드물었던 새로운 양식(樣式)의 식당이 군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당시 군산경제와 군산화교의 호황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군산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의 맥은 지금도 국제반점, 신풍원, 제일반점, 영빈각, 영화원, 홍영장 등의 간판을 달고 면면히 이어지며 군산의 중화요리업계를 주도하고 있다.

물론 중국음식점이 군산화교 업종의 전부는 아니었다. 손가락을 꼽는 데 그치지만 중국한의학의 전통을 계승한 한의원과 약방이 지금도 개업 중이다.


△개항 직후부터 군산에 흘러들어와

군산화교들은 언제부터 군산에 정착하기 시작했을까. 기록상으로 군산화교가 처음 나타난 것은 1899년 군산이 일본 등 열강들의 압력으로 개항하고부터다.

이후 인천과 원산에 거주하던 청인(淸人)들이 군산으로 이주해 규모가 불어났고, 인천~군산 간 정기여객선 항로가 개설돼 양 지역 화교의 왕래를 촉진했다.

초기 군산화교 규모는 개항 직후의 청국인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대략 추정할 수 있다.

개항 당시 군산항의 열강 조계평면도를 보면 청국인 지주 4명이 주로 영화동 인근 35곳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청국인 최대 지주는 5개 지역 5146㎡의 토지를 3356원에 경락받은 동순태(同順泰)였다. 그는 당시 ‘정치엔 원세개가 있고, 무역에는 동순태가 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중국 경제의 유력자였다.

따라서 동순태에 관한 기록은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이며 상업의 중심지였던 군산내항 인근 영화동 일대에 화교들이 진출했음을 시사한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노동자들이 만경강 북안(北岸)의 소위 ‘이완용 둑’ 축조 공사에 동원됐던 것으로 전해져 군산화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됐음을 추정케 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이주해온 군산화교들은 대부분 서해안을 맞대고 있는 산동성의 내항, 용성, 영동 지방 출신들이다.

숫자가 늘어나자 군산화교들은 1924년 인천 주재 중국영사의 협조를 받아 ‘인천상무 군산분회’를 설치했다. 화교의 주요 거점인 서울·인천·평양·신의주·원산·진남포·부산처럼 군산화교가 상인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를 정도로 불어난 것이다.

초기의 군산화교들은 대부분 포목점, 요식업 종사자, 농지를 경작한 농사꾼, 부두노동자들이었다. 이 가운데 포목점으로는 금생동·우풍더·쌍화전, 중국요리점은 동해루·쌍설루·평화원이 유명했다. 농민들은 현 삼학동 대우아파트 일대와 중앙초등학교 뒤쪽의 밭을 경작했고, 노동자들은 부두 하역장과 건설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군산화교들은 장사 수완 및 생활력뿐만 아니라 교육열도 왕성했다. 1941년 훗날 화교소학교로 발전한 중국어문강습소가 문을 열어 군산화교 2세들을 위한 초기 교육시설을 갖췄다. 명산동시장 끝자락에 자리 잡은 군산화교소학교의 재학생은 한때 200명에 육박해 호남 최대를 자랑했다.


△차별정책·수도권 집중에 ‘엑소더스’

일제강점기 때 중화상권이 번창한 인천, 서울, 부산 등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규모였던 군산화교는 개항 117년이 지난 지금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의 외국인등록제도 때문에 군산화교는 대부분 대만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군산시에 등록된 대만인 현황을 보면 2003년 173명, 2004년 169명, 2005년 158명, 2006년 152명, 2007년 155명으로 돼 있다. 군산화교협회가 2008년 직접 확인한 수치도 42세대 181명에 불과하다.

군산화교는 절대적 규모뿐만 아니라 상대적 비중에서도 급격히 위축됐다. 1985년 법무부와 중국대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60년대 4만 명을 헤아렸던 한국의 화교는 2만4742명, 4000여 명을 헤아렸던 전북의 화교는 1201명으로 급감했다.

감소추세는 이후에도 꾸준히 진행돼 2002년 말 한국의 화교는 2만1782명, 전북화교는 700명 안팎으로 더욱 줄었다. 같은 통계에서 군산화교의 이주는 더욱 가파르게 진행돼 익산의 299명에도 크게 못 미치는 178명으로 집계됐다.

한 때 전국적인 화교 집단거주지였던 군산의 화교가 이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주가 빠르게 진행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구성도 뿌리째 변했다. 2002년 통계에 잡힌 178명 가운데 대륙에서 태어난 이주 1세대는 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175명은 한국에서 태어난 후손들이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났으니 이젠 군산화교 1세대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NSP통신-군산화교소학교.
군산화교소학교.

군산화교의 급감은 군산화교소학교의 급속한 위축에서도 확인된다. 200명에 육박했던 재학생은 이제 50명에도 못 미치고 그마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한 한국 학생을 제외하면 순수 화교자녀는 10명 안팎에 불과하다.

군산화교가 이처럼 급감한 것은 두 가지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다. 하나는 경제활동의 제한과 이중국적 및 화교학교 학력 불인정 등 정부 차원의 제약에 따른 타국으로의 이민행렬이다. 여기에 수도권 집중화와 전북의 낙후에 따른 국내적 이동은 가히 ‘엑소더스’라고 할 만큼 군산화교의 대규모 유출을 부추겼다.

박정희 정권의 1962년 화폐개혁 추진은 화교들의 탈 한국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미국의 강력한 제동으로 불발됐지만 화폐개혁의 이유 중 하나가 화교들의 장롱 속 현금보따리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음은 ‘잘 알려진 비사’에 해당한다.

이어 음식점에서부터 원료제조공장에 이르기까지 인허가 취소, 영업재연장 억제 정책이 뒤따랐다.

특히 1970년대 화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의 시행은 이중국적 및 화교학교 학력 불인정 등 기존의 문제들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한국화교의 이민행렬을 부추겼다.

화교들의 엑소더스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말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6000여 명이 추가로 한국을 빠져 나간 후 1998년 IMF 금융위기 아래서 외국인에 대한 규제가 대폭적으로 완화되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 한도 역시 철폐되는 등 여건이 호전되면서 2만 명 선에서 안정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꽌시’를 여는 모색들

군산시 나운동 군경묘지 뒷산 중턱의 화교 공동묘지. 원래 삼학동과 오룡동 사이 산비탈에 위치했던 군산의 화교 공동묘지는 1970년대 초 도로 개설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군산화교 백년 역사와 애환을 잿빛 앨범처럼 담고 있는 이 묘역은 무한감회를 불러일으킨다. 돌아보면 군산화교 100년은 이념과 민족의 무게가 버거웠던 타국 생활 한 세기였다. 하지만 그 세월에서 ‘꽌시’의 씨앗이 잉태된 것도 사실이다.

이제 군산화교는 대부분 떠났지만 지난 역사를 토대로 새로운 교류가 확산되고 있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후 서해를 사이로 마주보고 있는 지리적 환경에 힘입어 한국 화교 1세대의 고향인 동북 3성과 서해안의 관문 군산은 국내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특히 군산시의 경우 1995년 산동성 연대시(煙臺市)를 시작으로 자매·우호 관계를 맺은 중국의 도시가 9개에 이르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새만금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관계가 활발히 모색되고 있다.

비록 개념은 다르지만 떠나간 화교들의 빈자리도 채워지고 있다. 군산대와 호원대 등 군산지역 대학의 중국 유학생이 400명을 헤아리고 있다.

군산과 중국의 교류 또한 급속히 팽창하는 중국경제와 함께 더욱 확대될 것임은 물론이다.

군산시가 지난 100년의 역사를 토대로 중국과의 새로운 ‘꽌시’의 역사를 열 수 있을까. 죽음까지도 함께 할 정도로 중국인의 삶을 관통하는 꽌시. 아마도 미래의 우정과 역사는 지난날을 곱씹어 성찰할 때 싹틀 것이다.

NSP통신/NSP TV 김광석 기자, nspks@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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