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NSP통신 허아영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후미코(文子) 이모 시집 가던 날 (전편)]
나에게는 어린 나를 업어 키워 주신 이모가 한 분 계셨다.
‘후미 이모’라 부르던 후미코 막내이모가 바로 그분이다. 후미코 이모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이 된 후 가족을 따라 한국으로 건너왔는데, 얼마 뒤 전쟁이 터져 피난살이를 하며 온갖 고생을 겪었다. 이후 내 부모님이 일본으로 떠난 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내 곁에 남아 가족을 돌보아 주셨다. 참으로 순박하고 고운 마음을 가진 이였다.
으레 막내라고 하면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마련인데, 이모는 그렇지가 못했다. 내 부모님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늘 바쁘게 일해야 했기 때문에 집안 살림 대부분을 이모가 맡아 했던 것이다. 부지런하고 손끝이 야물었던 이모는 대가족의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 나갔다. 그리고 부모님이 일본으로 떠나신 이후에는 나를 친자식처럼 여기며 사랑을 쏟아 키워 주셨다. 피난 시절 일찍 죽고만 야이꼬(八重子) 누나를 업어 키웠던 사람 역시 후미 이모였다. 첫 조카를 일찍 잃고 만 아픔 때문이었을까. 후미 이모는 나에게만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마음을 쏟아 주었다. 후미 이모가 있었기에 나는 부모님과 떨어진 설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나는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공터 한편에 책보를 던져 놓고, 구슬치기며 말뚝박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럴 때면 이모는 늘 마을 입구까지 걸어 나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외쳐 부르곤 했다.
"정희야, 어서 와 저녁 먹어야지."
온몸에 땀을 흠뻑 흘리며 친구들과의 놀이에 빠져 있다가도, 나는 이모의 그 정겨운 목소리가 들릴 때면 두 손을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만 더 놀다 가라며 친구들이 붙잡아도 듣지 않았다. 내 모습이 보일 때까지는 이모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보를 메고 땅거미지는 길을 한달음에 달려가면, 이모는 두 팔을 벌려 나를 맞아주곤 했다. 겨우 한나절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도 이모와 나는 며칠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내가 선생님의 질문에 제일 먼저 대답했다거나 시험을 잘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이모는 몹시 대견해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더러워진 내 얼굴과 손을 깨끗이 씻기고 넓은 치맛자락으로 닦아 주었다. 그때마다 치맛자락에서는 이모만의 훈훈한 냄새가 났다. 나는 흙먼지를 닦아낸 훤한 얼굴로 이모와 마주보며 웃었다. 나는 정 많고 다정다감한 후미 이모를 정말로 좋아했다. 우리에게는 둘만의 비밀도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그날, 할머니는 추수한 보리를 타작하러 읍내 방앗간에 나가시고 집에는 나와 이모 둘뿐이었다. 때문에 삼천포 시장에서 생선 장수들이 찾아왔을 때, 나는 후미 이모를 조르기 시작했다. 갈치회가 너무나 먹고 싶었던 것이다. 이모는 잠시 망설였다. 이모의 수중에는 갈치를 사 줄만한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끼는 조카가 갈치회가 먹고 싶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후미 이모는 뒤주 안에 든 쌀을 몇 되 내어주고 갈치를 받아 왔다. 외할머니가 계셨다면 귀한 쌀을 갈치와 바꾸어 먹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를 위해 이모는 큰 모험을 한 셈이었다.
이모가 가져온 갈치는 은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신선한 놈이었다. 새벽에 갓 잡아 올린 것이 분명했다. 짭짤한 바다내음에 입 안에는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이모는 호박잎으로 문질러 비늘을 벗긴 뒤, 회를 쳐서 내 주었다. 그 하얀 속살을 초고추장에 찍어 한 입 가득 넣고 씹는 맛이라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자 이모도 기뻐했다. 나는 정신없이 갈치회를 먹었다. 그런데 허겁지겁 먹다 그만 가시가 목에 걸리고 말았다. 뻣뻣한 가시 하나가 목구멍에 제대로 박혀 빠져 나올 생각도 안하는 것이었다. 목이 따끔거리더니 나중에는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 이모는 놀라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든 가시를 빼 주려 해도 이모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모는 나를 업고 십 리 길을 달렸다. 이웃 마을에 사는 군대 의무병 출신 문 씨 아저씨 집으로 나를 데려갔던 것이다. 다행히 문 씨 아저씨는 집에 계셨고, 목에 박혔던 가시를 금세 빼내 주셨다. 눈물까지 흘리며 괴로워하던 나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모 역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돌아오는 길, 통증은 모두 가셨는데도 나는 이모의 등에 업혀 왔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모 역시 불평 한 마디 없이 나를 기꺼이 업어 주었다. 이모의 등은 따뜻했고, 뒷덜미에 고개를 묻으니 더없이 포근했다. 이모와 나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절대로 쌀과 갈치를 바꾸어 먹었다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 말이다. 귀한 쌀로 생선을 바꾸어 먹은 것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가시까지 걸려 고생한 것을 알면 두 분이 걱정하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노라 단단히 약속했다. 그 일은 이모와 나만의 비밀로 남았다. 그렇게 정 많고 나를 아껴주던 이모가 시집을 간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nsplove@nspna.com, 허아영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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