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면희 칼럼
철학의 눈으로 본 AI의 특성과 한계(서울=NSP통신) 세기의 바둑대결 1차전 하루 전날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구글 ‘딥마인드’가 승리한다면 인류가 기계와의 정신 승부에서 무너진다는 의미라고 평했는데, 이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2016년 3월 9일 열린 첫 대국서 세계 최고의 프로기사 이세돌이 구글의 알파고에게 패한 것이다.
남은 대국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것만으로 엄청난 충격이다. 컴퓨터의 지능적 처리 능력, 즉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갈수록 가파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이미 예견된 것이다.
AI가 거둔 바둑 분야의 전문적 학습 성취는 다른 분야로도 확산될 것이다. 분명하게는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인간의 생활이 풍요와 편리함으로 가속화 될 것이다. 기대와 즐거움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자본과 권력이 이끄는 방향으로 수렴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예컨대 그것이 경제와 더불어 산업화의 엔진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물질적 성장이라는 밝음을 주고 있지만 환경재앙이라는 깊은 어두움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AI도 마찬가지다. AI를 여러 시각에서 조망하여 평가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과연 그것이 가디언의 언급처럼 인간과 동질의 정신적 사유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영국의 천재 수학자로서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로 지칭되는 알란 튜링(Alan Turing)은 1950년에 세계적 철학 전문잡지 마인드(Mind)에 “계산기계와 지능”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흥미진진한 사유실험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재구성을 해보자. 방 안과 바깥에서 대화가 컴퓨터로 오고가는 가운데 진실을 알아맞히는 일련의 게임이 펼쳐진다.
첫째 장면에서는 무지의 베일을 쓴 바깥 평가자의 질문에 대해 1번방의 여성은 진실을 얘기하는 반면, 2번방의 남성은 평가자의 판단이 헷갈리도록 임무를 부여받는다.
예컨대 “매달 가끔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는 때가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성은 “그럴 때가 종종 있다.”고 답변하는 반면, 남성은 한 술 더 떠서 “며칠간은 흥분과 우울감이 기복을 이루는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고 그럴싸하게 답변한다.
어느 방에 여성과 남성이 들어가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까다로운 일련의 질의응답이 진행된 끝에 판단이 이루어진다.
둘째 장면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3번방에 인간이 들어가 있고 4번방에는 AI가 구현된 컴퓨터가 장착되어 있다.
방 바깥 평가자가 여러 질문을 던지기는 하는데 그 답변서 미세한 차이를 분별하려고 할 것이다.
예컨대 “저녁은 어찌 해결하였는가?”란 질문에 대해 인간은 “날이 추워서 뜨거운 설렁탕을 사먹었다.”고 답변하는 반면, AI는 실제로 전기로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을 뿐임에도 “집에서 두부와 애호박을 숭숭 썰어 넣은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고 응답하는 것이었다.
이제 튜링은 이렇게 단언하게 된다.
첫째 장면에서 평가자가 10회의 질의응답 끝에 성별을 판별하는 정답 비율이 60~70% 밖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둘째 장면에서도 인간과 기계의 판별이 유사한 비율에 이르게 된다면, 4번방의 AI는 2번방의 남성만큼 지능적으로 능숙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이므로 마침내 이런 연산기계는 능히 정신을 갖춘 인조인간이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950년인 당시와 달리 과학기술의 발전에 비추어 향후 50년 뒤에는 마침내 자신의 테스트를 통과한 계산기계가 출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런 정도의 AI 출현은 아직 멀었기 때문에 그의 시기 진단은 빗나갔지만, 바둑판에서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는 이세돌과 맞장을 뜬 알파고는 튜링의 예측을 한 영역에서나마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튜링이 자신의 테스트를 통과할 AI의 완성을 후세 과학자들에게 당부했고, 이는 무르익고 있었다.
미국은 1970년대 이후 미래의 주도적 산업으로 AI를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 버클리대의 철학교수 존 썰(John Searl)은 사유실험을 통해 AI의 특성과 한계를 분별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역시 이해가 쉽게 그 취지를 재구성해보자.
바뀐 장면 3에서 한국인인 나(곧, 여러분 자신)는 바깥 러시아인과 컴퓨터로 대화를 할 러시아방에 들어와 있다.
러시아인이 내게 이상한 모양의 기호로 된 첫 질문을 던진다. 다만 내 방안에는 러시아어 기호로 가득 찬 바구니가 있고, 그 옆에는 기호를 모양만으로 판별하여 배열하게 하는 규칙책자가 있다.
나는 컴퓨터로 배달된 첫 질문에 대해 규칙책자와 기호 바구니를 부지런히 활용해 일련의 기호 배열을 응답으로 보내주었다. 그랬더니 바깥사람이 흡족해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첫 질문은 “당신은 어떤 색을 좋아하느냐” 는 러시아 말이었고, 내가 보낸 답변은 “나는 푸른색을 매우 좋아하는데, 초록색도 어느 정도 좋아한다”로 해석되는 것이었다.
물론 질문자가 어떤 질문을 던지더라도 그가 납득이 갈 정도의 답변을 내가 기호를 부지런히 조작하여 내보낸다면, 나는 가히 러시아어 튜링 테스트에 통과한 것일 터이다.
이제 장면 3을 AI 모드로 전환해 보자. 질문은 입력(input)이고 답변은 출력(output)이며, 자료 바구니는 데이터베이스고 규칙책자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튜링 테스트에 통과한 AI다.
그런데 내가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된 산물을 내놓은 것처럼, 역시 AI도 자신이 수행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 이해나 의미 간파는 정신활동의 핵심이다.
따라서 AI가 인간의 삶 전반과 관련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 자체가 요원하지만, 설혹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과 동질의 의미로 정신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썰에 대한 AI 진영의 반론이 있었고 또 그것이 강화학습을 하는 인공신경망으로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기본 맥락은 같을 것이다.
이번 알파고는 온라인에 올라온 16만 건의 기존 바둑 기보를 승패로 분류하여 이기는 수에 가중치를 두는 방식으로 설계된 딥러닝, 즉 강화학습 프로그램을 장착했는데, 시행착오 오류제거 방법에 따른 병렬형 신경망 정보처리를 한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유용하게 지식을 구하는 한 방식에 불과할 뿐이다. 예컨대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접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창조적으로 전진하는 반면, AI는 지능적 모방으로 정교하고 빠르게 다가올 뿐이다. 지능에서 감성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구글 본사에 출근하는 여러분에게 AI 안내 여성이 “오늘은 어제보다 화색이 밝으시네요. 좋은 하루 맞으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당신이 “고맙습니다.”고 응답하자 재차 “이렇게 하는 게 제 기쁨입니다.”라고 한다 해도, 그 AI 여성이 실제의 인간적 감성 상태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과학자들이 노벨상 수상 가능한 창조 이론을 제품 만들 듯이 마구 생산할 기계 AI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데서 그 한계를 볼 수 있다.
필자의 논의는 인간이 기계적인 연산 프로그램을 통해 생명 창조의 반열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할 뿐이지 인간의 지능을 닮거나 일부 특성(계산 등)에서는 탁월한 그런 기능적 도구로서의 AI를 출현시킬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후자라 하더라고 기능적 AI가 인간의 지능적 역할을 대체할 것이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각종 사회문제를 초래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숙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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